함종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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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源(연원) 및 氏族史(씨족사)

  咸從魚氏의 始祖(시조) 戶長同正公(호장동정공) 諱(휘) 化仁(화인)은 중국 풍익(지금의 섬서성)에서 南宋때(고려 明宗 元年) 난을 피하여 처음 江陵(강릉)땅에 왔다가 뒤에 평안남도 咸從으로 옮겨서 6世 檢校軍器監事公(검교군기감사공) 휘 石公(석공)까지 高麗朝(고려조)에 벼슬하여 顯族(현족)으로 세거하였기에 우리 魚氏는 함종을 本貫(본관)으로 삼게 된 것이다.
  朝鮮朝때 선의왕후魚氏(有龜의 따님)가 20대 景宗大王(경종대왕)의 王妃(왕비)가 되면서 咸從縣(함종현)이 咸從府(함종부)로 승격되었다.
大韓帝國(대한제국)에 와서 평안남도 江西郡 咸從面이 되었다.

  함종어씨의 派名錄(파명록)을 보면 文貞公派(문정공파), 襄肅公派(양숙공파), 縣監公派(현감공파), 訓導公派(훈도공파), 護軍公派(호군공파), 浪仙公派(낭선공파), 司直公派(사직공파), 漢宗公派(한종공파), 漢緯公派(한위공파), 漢亨公派(한형공파), 副正公派(부정공파)로 11계파가 성세를 이루었다.
  2000년도 정부의 인구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280姓氏 中 魚氏가 인구 순위 95위(17,551명)로 3개 魚氏(咸從, 忠州, 慶興)중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서울과 경기, 강원, 경남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先祖(선조)의 주요 世居地(세거지) 변천을 보면, 始祖(시조) 戶長同正公(호장동정공)이 처음 강릉 땅에 왔으며, 뒤에 함종에 살다가 7世 中郞將公(중랑장공)이 영남 晋州(진주)로 옮기어 8世 署令公(서령공) 휘 得龍(득룡), 9世 左尹公(좌윤공) 휘 伯游(백유), 10世 휘 淵(연), 11世 直提學公(직제학공) 휘 變甲(변갑)까지의 산소를 경남 固城(고성)과 咸安(함안)등지에 모시게 되었다.
  한편 강릉에는 3世 檢校衛將軍公(검교위장군공)이 세거하면서 현재까지 江原道 일원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10世 縣令公(현령공) 휘 淵(연)의 다섯아들 중 큰아들 直提學公(직제학공) 휘 變甲(변갑)이 大科에 장원하여 出仕(출사)한 후 대물려 높은 벼슬에 올라 12世 文孝公(문효공)이래 그 후계가, 서울에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령공의 막내아들 휘 變文(변문)의 후계자가 경남 金海(김해)에 자리 잡았다.

  13世 문정공 휘 世謙(세겸)의 자손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현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자리 잡았다. 문정공의 동생 襄肅公(양숙공) 휘 世恭(세공)의 5형제 중 큰아들 14世 府使公(부사공 : 孟淳)의 자손들은 경기도 고양 용인 양주 등지에 護軍公(호군공 : 孟渾) 校尉公(교위공 ; 孟湛) 司果公(사과공 : 孟淙)의 후손들은 경남 고성과 충북 충주에 자리 잡았다.
  魚氏는 咸從, 忠州, 慶興, 의 三本이 전하고 있으나 어씨는 대부분이 함종어씨로 알려져 있고, 조선조에서 대대로 벼슬하기는 주로 함종어씨였다.

  오늘날 인구는 비록 적지만 역사적으로 國婚(국혼)도 하고 정승과 名臣(명신)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조선조에 30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고, 그중에 정승 1명(연산조 좌의정 휘 世謙), 湖堂(호당) 2명(좌의정 世謙, 집의 泳濬), 淸白吏(청백리) 1명(집의 泳濬), 文衡(문형) 1명(좌의정 世謙), 經筵官(경연관) 1명(찬성 有鳳), 功臣(공신) 2명(함종부원군 정난3등 世謙, 아성군 적개2등 世恭), 將臣(장신) 1명(함원부원군 호위대장 有龜), 節臣(절신) 2명(좌의정 世謙, 판돈녕부사 有龍)등을 배출하여, 어느 대성에 못지않은 名門이라 할 수 있다.

  함종어씨 중흥의 祖는 綿谷公(면곡공) 휘 變甲(변갑)이다, 世宗때 명신으로 太宗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集賢殿直提學(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咸安(함안)에 돌아가 老母를 봉양했다.
  면곡의 아들 文孝公(문효공 : 孝瞻)은 조선초기의 大儒(대유)로서 명성이 높았다, 24살(1429)에 문과급제하여 집현전교리가 되어 젊은 학자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대 왕조에서 大司成(대사성)과 大司憲(대사헌) 吏曹判書(이조판서)에 승진, 이어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에 이르러 치사하고, 奉朝賀(봉조하)가 되었다. 議政府 領議政 咸從府院君(의정부 영의정 함종부원군)에 추증되고 시호가 文孝이다.

  문효공의 두 아들이 바로 文貞公(문정공 : 世謙)과 襄肅公(양숙공 : 世恭)이다.
문정공은 세조2년(1456)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예종대왕이 즉위하자,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咸從君에 봉해졌다. 平安道 觀察使(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成宗大王이 즉위하자 大司憲(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奏問使(주문사)가 되어 3, 4차나 明나라를 왕복하면서 建州征伐(건주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등 外交的 성공을 거두고, 공조, 형조, 호조, 병조판서를 거쳐 右議政(우의정)이 되어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과 咸從府院君(하종부원군)으로 가자되고 左議政(좌의정)이 되었다. 机杖(궤장)을 하사받았고,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文貞이다.

  문정공의 아우 襄肅公(양숙공 : 世恭)은 형과 나란히 문과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左承旨(좌승지)를 역임하였고, 1467년 李施愛亂(이시애란)이 일어나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敵愾功臣(적개공신) 2등으로 牙城君(아성군)에 봉해지고, 1468년 謝恩副使(사은부사)로 明나라에 다녀와서 경기관찰사와 漢城判尹(한성판윤)을 역임 후 호조판서로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을 겸하고 이어 병조, 공조, 형조판서 등을 지낸 후 左參贊(좌참찬)이 되었다, 시호는 襄肅(양숙)이다.
  학술과 시문에 능한 灌圃公(관포공) 휘 得江(득강)은 14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校理(교리) 大司諫(대사간)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上護軍(상호군)을 사직한 후 여러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고, 오로지 학술과 시문에 전심하였으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경남 고성의 葛川書院(갈천서원)과 雲谷書院(운곡서원)에 배향되었다.
  淸白吏(청백리)로 녹선된 松亭公(송정공) 휘 泳濬(영준)은 1507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弘文館(홍문관) 修撰(수찬) 司諫院 正言(사간원 정언)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 등을 지내고, 湖堂(호당)에 올랐으며 효행이 卓世(탁세)하여 命旌(명정)이 되었다.
  也足堂公(야족당공) 휘 叔權(숙권)은 한때 栗谷(율곡) 李珥(이이)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博學能文(박학능문)하여 詩評(시평) 詩論(시론)이 뛰어난 학자로서 史文과 中國語에 능하여 1525년 吏文學官이 되었다, 禦侮將軍(어모장군) 副護軍(부호군)과 錄光國原從功臣(녹관국원종공신)이며 편서로 稗官雜記(패관잡기)와 故事撮要(고사촬요)가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府使公(부사공) 휘 泳潭(영담)은 지략이 뛰어나 呂島萬戶(여도만호)에 발탁되고, 무과에 급제한 후는 여러 鎭官(진관)의 막하로 있으면서 海路(해로)를 익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光陽縣監(광양현감)으로 충무공이순신 휘하에서 주로 향도로 활약 玉浦(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1597년 정묘재란 때 노량해전에서의 전공으로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승진, 다음해 助防將(조방장)이 되어 어선포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양숙공의 증손인 牙善君(선군) 휘 季瑄(계선)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都承旨(도승지)를 역임하고, 1560년에 형조참판이 되어 牙善君에 봉해지고, 연경성절부사로 明나라에 다녀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漢城判尹(한성판윤)과 工曹判書(공조판서)와 議政府左參贊(의정부좌참찬)에 이르고 耆老所(기로소)에 들었다.

  함종어씨가 낳은 대표적인 학자 杞園公(기원공) 휘 有鳳(유봉)은 양숙공의 9대손이다, 農巖(농암) 金昌協(김창협)의 門人(문인)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巨儒(거유)이다, 호조참의와 經筵官(경연관) 世子侍講院(세자시강원) 贊善(찬선)을 지냈다, 그의 문하에서 李天輔(이천보) 洪象漢(홍상한) 尹得觀(윤득관) 등 학자가 배출되었다.
  기원공의 아우 御營大將(어영대장) 휘 有龜(유구)가 곧 제20대 景宗大王(경종대왕)의 國舅(국구 : 장인)이다. 그는 御營(어영)과 扈衛大將(호위대장)을 지내면서 老論(노론)들이 화를 입게 되자 노론을 적극 옹호했다. 咸原府院君(함원부원군)에 봉해지고, 大匡輔國(대광보국) 崇祿大夫(숭록대부) 議政府 領議政(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시호가 翼獻(익헌)이다.
  그의 6촌 아우인 靖憲公(정헌공) 휘 有龍(유룡)은 노론의 맹장으로 辛壬士禍(신임사화) 때 귀양을 갔었고, 뒤에 英祖가 즉위하면서 풀려나와 大司諫(대사간)에 이르고 1744년 사은부사로 淸나라에 다녀왔고, 황해, 강원감사와 지중추부사, 한성판윤과 보국숭록대부 判敦寧府使(판돈녕부사)를 역임,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다, 향년 87세, 시호가 靖憲(정헌)이다.

  근세에 와서 武臣(무신)으로 鎭撫中軍(진무중군) 휘 在淵(재연)은 양숙공의 12대손으로 충청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거쳐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함대가 江華(강화)에 침입해 오자 右先峰(우선봉)으로 廣城鎭(광성진)을 수비했고, 辛未洋擾(신미양요)1871년 때는 진무중군으로 다시 광성진을 수비하다가, 미국군과 치열한 전투 중 그의 아우 吏議公(이의공) 휘 在淳(재순)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兵曹判書(병조판서) 兼知三軍府事(겸지삼군부사)에 추증되고, 시호가 忠壯(충장)이다.

  구한말의 개화대신인 度支部大臣(탁지부대신) 휘 允中(윤중)은 1881년 신사유림단을 이끌고 日本의 문물을 시찰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淸國과의 외교활동을 했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떴고 진보적 경제이념을 체계화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란, 아관파천까지 격랑의 한 시대를 살며 점진적으로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제1차 金弘集(김홍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에 임명된 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치고 그의 경제론을 우리나라 근대경제학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서북경략사로 파견되어 淸 ㆍ露(청ㆍ노)와의 국경을 정하는데 노력하여 間島(간도) 영유권의 최초확인자로서 간도는 명백히 조선 땅이라고 보고했으나, 뒷날 日帝에 의해 간도영유권은 멋대로 淸에 넘겨졌다. 奎章閣 大提學(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고 시호는 忠肅(충숙)이다.

  우리 魚門의 이채를 띄운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로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魚允姬(어윤희)여사를 들 수 있다.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3˙1운동1주년을 기념하고자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제히 옥중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53년 나이팅게일기장,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
  允迪(윤적)은 韓末(한말)의 문신, 학자, 1904년 외무부참사관을 지내다가, 총영사관이 되고 이어 龍川府尹(용천부윤)이 되었다. 1907년 학부 편집국장이 된 후 국문연구소 개설의 주동적 역할을 하여 국문통일에 노력하였다. 그 후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장과, 관립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